[기획글]‘돌봄사회’로의 전환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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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964회 작성일 22-03-29 13:18본문
‘돌봄사회’로의 전환을 꿈꾸며
ㅡ3.8여성의날 대전공동행동 기자회견 발언문(대전여성단체연합)
천정연(대전여민회 활동가)
안녕하세요. 저는 대전여민회 활동가이자, 웹툰작가이자,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3년 전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육아휴직하고 작년에 직장에 복귀했습니다. 2년 만에 돌아온 사무실의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사무실 마당 한켠 화단에는 앵두가 소복이 열리고 있었고 부추와 상추, 고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화단 옆에는 길고양이가 쉴 수 있는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밥그릇과 물그릇에는 사료와 물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곳을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돌봄의 첨병”에서 홀로 고군분투한 줄 알았는데, ‘돌봄’은 여기에도 있었습니다. 이 척박한 도시에서 수많은 생명들은 여민회 사무실 작은 화단에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돌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왔고 또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돌봄 없이 홀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돌봄은 누가 담당하고 있습니까? 코로나로 학교가 폐쇄되고 원격수업을 할 때 아이들의 삼시 세 끼를 챙기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녀 육아도 모자라 황혼 육아로 아픈 몸을 이끌고 손주들을 돌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유치원, 초등 저학년 아이를 둔 맞벌이 부부가 코로나 상황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린이집에서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고강도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들은 누구입니까? 요양병원에서 코로나 감염을 무릅쓰고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요양보호사들은 누구입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국면에서 우리는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돌봄노동은 무급노동이거나 저급노동이거나 자주 비정규직입니다.
모두가 돌봄이 필요하고 모두가 돌봄의 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그 역할은 오롯이 여성들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와 기업은 언제까지 여성들의 돌봄에 무임승차할 생각입니까?
저는 이번 대선에서 후보들 간에 생산적인 토론과 정책적 대결을 통해 ‘돌봄’을 사회적으로 환기시키고 사회적 합의를 해 나가기를 기대했습니다. 여성들이 떠맡고 있는 돌봄을 사회가 어떻게 나눠져야 할지, 우리 사회가 돌봄사회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서로 묻고 따지기를 기대했습니다.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걸까요? 연일 뉴스에서 들리는 것들은 듣고 싶지 않은 온갖 스캔들과 소모적인 정치공방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후보는 우리 사회에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저는 둘째를 키울 때 여가부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이돌보미 서비스’ 덕분에 돌보미 선생님과 육아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는 남편이 육아의 주체가 되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첫째를 혼자 키우며 느꼈던 고립감과 경력단절의 고통을 조금은 덜 수 있었습니다. 또한 웹툰작가로서, 여성들이 결혼-출산-육아의 과정을 지나며 겪는 불평등과 구조적인 문제에 관해 기록을 남기는 만화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많다고 하는 아이돌보미 서비스가 있어서 그렇게나마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2년 넘게 육아휴직을 했지만, 남편은 아직 육아휴직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요원해 보입니다. 2020년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이 3.4%라고 하니(여성 63.9%) 직장 다니는 남편들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은 둘이 같이 만들었는데, 심지어 저는 열 달 동안 품고 배를 갈라 낳기까지 했는데, 아이를 키우는 일까지 저 혼자 감당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성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재 저는 여성단체에서 ‘디지털 성폭력 모니터링’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상에서 여성들이 겪는 참혹한 폭력과 인권유린의 현실과 정면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소위 ‘n번방 방지법’의 시행이 온라인 상의 성 착취물 삭제 신고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 현장에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선후보는 ‘n번방 방지법’을 원점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고죄에 더해 ‘성폭력 무고죄’를 신설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는 그 후보에게 디지털 성폭력 모니터링을 한번 해보시라고, 온라인 상에서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좀 보시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2022년을 살아가는 오늘도 저는 성차별과 성폭력으로 둘러싸인 여성들의 현실을 매일 마주합니다. 이러한 현실에 지지 않고 여성들은 오랫동안 힘과 지혜를 모아왔습니다. 그들의 땀과 눈물, 수많은 노력과 결실들을 부정하고, 과거로 퇴행하려는 대통령 후보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대통령까지 하려고 하는 사람이 ‘성평등’ 가치에 대해 이 정도로 무지와 몰이해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돌봄은 남성의 얼굴을 해야 하고, 우리 모두의 얼굴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세계 2위의 노동시간에 빛나는 장시간 노동 관행을 끊어야 합니다. 모두가 4시에 퇴근하거나, 모두가 주 4일만 근무하고, 남은 시간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합니다. 돌봄이 여성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국민소득 3만불 시대지만, 출생률 최하위, 자살률 1위에 빛나는, 어느 사회보다 불행한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성장해야 우리는 만족할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서 저는 사무실 한켠 작은 화단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조금 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조금 더 돌봐야 합니다. ‘돌봄사회’로의 전환, 그것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를, 노인을, 동물과 식물을, 주변의 생명들을 돌보는 사회, 생명을 환대하는 사회. 대전여민회 사무실 한쪽 화단에 펼쳐진 ‘돌봄사회’가 한국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길 저는 희망해 봅니다.
돌봄과 연대와 정의를 위해, 한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깨부수기 위해 여성들은 오늘도 페미니즘을 외칩니다. 이제는 한국 사회가 답할 차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내일 꼭 성평등에 투표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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