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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글] 무엇을 대신 어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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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1,609회 작성일 21-01-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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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제는 지난해가 된 2020년, 지역 청소년/청년 페미니스트 그룹 이야기 프로젝트 <우리의 페미니즘>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이야기프로젝트에 참여한 팀중 <앞으로 우리의 페미니즘> 네트워크파티에 참여했던 팀들의 원고를 연재합니다. 주제는 '2020 나의 페미니즘 정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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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대신 어디를

 

 

 본격 이성애 권장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주인공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서점에 따라간 남자 주인공이 주인공 대신 찾아주려고 한 책이, 페미니즘 고전 <여성의 신비>(현재 여성성의 신화로 재출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영화를 본 지 10년이 지나서이다. 인터넷 서핑 중 우연히 접한 클립 영상에서 그 장면을 다시 만나고 당황스러우면서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10년 전 나는 <여성의 신비>가 어떤 책인지 몰랐고, 주인공이 데이트 폭력 경험을 당한 경험이 있으며, 사회적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꼴통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쪽(?)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 영화를 특이한 여자의 특별함을 알아봐주는 남자의 구원 서사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나름의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영화의 스토리를 다시 생각해봐도, 이 영화는 잘 만든 이성애 권장 판타지 영화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같은 컨텐츠가 다르게 다가오는 경험은 그 외에도 무수하다. 예를 들면 대학 1학년 때 봤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상과 현실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다시 보니 중산층 백인 여성의 우울과 좌절을 담은 <여성의 신비> 영화판이자 임신중단 이슈도 다루고 있는 페미니즘 영화였다. 너무 많이 봐서 어떤 에피소드를 봐도 무슨 내용인지 달달 외울 지경인 <섹스앤더시티> 시리즈는 한국 너머 어딘가에 있는 신여성(!)들의 환상적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백래시의 교과서 같은 드라마다.

 

 같은 컨텐츠를 다르게 겪는 경험을 할 때마다 어떤 측면에서는 무엇을 선택해서 보느냐보다, 무엇을 생각하며(찾으며)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순수한 여성 영화를 찾으려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여성들에게는 ‘여성 서사’나 ‘여성주의 영화’에 대한 고민과 갈증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기존의 판을 점유해온 남성권력에게 한 푼의 돈도 보태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온라인에서는 이 영화는 여성 영화다/아니다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어떤 영화는 보기도 전에 김이 새서 보고 싶지 않아진다.

 

 무엇이 여성 영화인가? <경계선>을 보고 인간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읽을 수도 있지만, 누가 타자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영화라고 읽을 수도 있다. <아워 바디>를 보고 중년 남성과의 섹스로 귀결되는 그저 그런 영화라는 평을 할 수도 있지만, 여성의 자기파괴적 욕망을 치열하게 해석하며 몸의 한계를 다룬 영화라는 평을 할 수도 있다. <차이나 타운>을 보고 유쾌한 미러링 여성 스릴러라는 평을 할 수도 있지만, 남성성을 답습한 채 주인공만 바꾼 남성 감독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평할 수도 있다. 어떤 영화는 누군가에겐 여성 영화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을 피하기 위해 <밤쉘>이나 <미스비 헤이비어> 같은 ‘대놓고 페미니즘’ 영화만 선택하거나 추천하는 경우도 있다.(물론 이 경우에도 영화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영화 모임을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들마다 무엇이 여성 영화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점과, 우리가 페미니스트로서 이 자리에 모인 한 어떤 영화를 다루어도 그 안에서 여성주의적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고민하는 여유를 갖고 서로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듣고 나눌 수 있기만 하다면. 순수한 여성 컨텐츠를 찾아 헤매다 기운을 빼기보다, 한계가 있는 영화를 만났을 땐 그 한계를 꼭지로 페미니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비자이고 싶다.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파수꾼>이다. 여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며 남성감독의 남성적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 이 영화에서, 남성성의 한계와 종말이라는 (아마도 감독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메세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처럼 (내 기준) 한계가 없는 영화를 만났을 땐 맘껏 찬양하며(!)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이 글이 어떤 영화든 무조건 봐도 된다, 모든 영화는 여성 영화다- 같은 메세지가 아님을 부디 알아주시길 바란다. 2021년엔 더 많은 여성들과 자유롭고 편안하게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여성주의영화모임 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