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호 회지-지금우리는!] 평양의 두 김 형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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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8,908회 작성일 09-09-29 14:01본문
평양의 두 김 형제에게
최 교 진(대전통일교육협의회 회장)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니 더운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습기 잔뜩 묻은 후텁지근한 날씨는 견디기 쉽지 않군요. 평양의 요즘 날씨는 어떤가요? 날씨와 상관없이 올해도 남북공동행사를 치르지 못하고, 2년째 남과 북이 따로 8.15 행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즈음입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민간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심양과 북경에서 만나 남북 민간단체가 함께 준비하는 민족공동 행사를 치르기로 합의하고, 세부 일정과 내용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회담을 많이도 했지요. 그 때부터 8년 동안 남쪽에서 정모, 이모 두 사람이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북에서는 당신들 두 김형이 실무 책임자로 빠지지 않았지요. 두 분은 남쪽에서 흔히 얘기하는 꽃미남으로 잘 생긴데다, 상당한 교양과 내공이 있어 보여 남쪽 인사들에게도 상당한 호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당신들의 고집스런 태도는 우리를 많이 당황하게 했지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자들의 주석단 자리 배치 때문에 몇 시간씩 다투는 일은 의례처럼 되어 있었구요. 남쪽의 사정을 잘 아는 당신들은 남쪽의 보수단체 대표를 슬쩍 주석단에 앉게 할 수 없다고 시비를 걸어 당황스럽게 만들고는, 시간이 지난 뒤에 양보하듯이 남쪽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선심 썼다는 듯 웃을 때 얄밉기도 했지요.
서울에서 행사할 때 사회자가 실수로 ‘탈북자’라는 용어를 두 차례나 반복한 것을 의도적이라며 즉각 문제제기를 하고, 행사 중단을 선언해 속을 태우게 하더니, 그 다음 순서로 나온 북쪽 가수들이 노래를 할 때 ‘단군조선’이라고 합의한 가사를 ‘태양조선’으로 슬쩍 바꿔 부르게 하고서는 실수였다고 웃으며 배짱을 내밀 때 얼마나 약 오르고 미웠는지 모릅니다. 결국 그날 저녁 아홉 시 예정된 합동 만찬은 밤 12시 넘어 겨우 진행했지요. 2001년 6.15 한 돌을 맞아 치른 대회 때는 사전 약속을 무시하고 그 해 새로 만든 3대 헌장 기념탑 앞에서 행사를 치르겠다고 통보해서, 남쪽 공식 단장인 김신부님은 서울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고 그에 따라 호텔에서 철수 문제를 상의하고, 몇 단체 참가자들은 대회장에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공식 사과를 받고 대회는 치렀지만, 뻔히 전개될 상황을 알면서 그렇게 처리하는 당신들의 처지가 한편 이해되기도 했지만 속이 많이 상했었습니다.
몇 년 전 같으면 그렇게 티격태격 하면서 함께 민족 공동행사를 준비해 치르고, 이제는 선수끼리(?) 서로를 충분히 알면서, 행사 마치면 통일을 향해 또 한 걸음 내딛는 자리를 준비하는 심부름꾼 노릇을 한 것에 대해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악수해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고 지나가는군요. 더구나 작년에 남쪽 정모는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고, 북쪽의 두 김 형도 작년부터 남북 실무 접촉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궁금합니다. 남북 관계가 다시 풀려 큰 일을 해야 할 때를 위해 어딘가에서 준비하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분단 65년이 다 되어가는 8.15를 함께 맞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은 우리 모두 같을 거란 생각에 더욱 오늘은 두 김 형이 보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가장 멋진 공동행사를 함께 준비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통일의 그날까지 서로 건강하게 견뎌 봅시다.
2009년 8월에 남쪽에서
최 교 진(대전통일교육협의회 회장)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니 더운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습기 잔뜩 묻은 후텁지근한 날씨는 견디기 쉽지 않군요. 평양의 요즘 날씨는 어떤가요? 날씨와 상관없이 올해도 남북공동행사를 치르지 못하고, 2년째 남과 북이 따로 8.15 행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즈음입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민간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심양과 북경에서 만나 남북 민간단체가 함께 준비하는 민족공동 행사를 치르기로 합의하고, 세부 일정과 내용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회담을 많이도 했지요. 그 때부터 8년 동안 남쪽에서 정모, 이모 두 사람이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북에서는 당신들 두 김형이 실무 책임자로 빠지지 않았지요. 두 분은 남쪽에서 흔히 얘기하는 꽃미남으로 잘 생긴데다, 상당한 교양과 내공이 있어 보여 남쪽 인사들에게도 상당한 호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당신들의 고집스런 태도는 우리를 많이 당황하게 했지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자들의 주석단 자리 배치 때문에 몇 시간씩 다투는 일은 의례처럼 되어 있었구요. 남쪽의 사정을 잘 아는 당신들은 남쪽의 보수단체 대표를 슬쩍 주석단에 앉게 할 수 없다고 시비를 걸어 당황스럽게 만들고는, 시간이 지난 뒤에 양보하듯이 남쪽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선심 썼다는 듯 웃을 때 얄밉기도 했지요.
서울에서 행사할 때 사회자가 실수로 ‘탈북자’라는 용어를 두 차례나 반복한 것을 의도적이라며 즉각 문제제기를 하고, 행사 중단을 선언해 속을 태우게 하더니, 그 다음 순서로 나온 북쪽 가수들이 노래를 할 때 ‘단군조선’이라고 합의한 가사를 ‘태양조선’으로 슬쩍 바꿔 부르게 하고서는 실수였다고 웃으며 배짱을 내밀 때 얼마나 약 오르고 미웠는지 모릅니다. 결국 그날 저녁 아홉 시 예정된 합동 만찬은 밤 12시 넘어 겨우 진행했지요. 2001년 6.15 한 돌을 맞아 치른 대회 때는 사전 약속을 무시하고 그 해 새로 만든 3대 헌장 기념탑 앞에서 행사를 치르겠다고 통보해서, 남쪽 공식 단장인 김신부님은 서울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고 그에 따라 호텔에서 철수 문제를 상의하고, 몇 단체 참가자들은 대회장에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공식 사과를 받고 대회는 치렀지만, 뻔히 전개될 상황을 알면서 그렇게 처리하는 당신들의 처지가 한편 이해되기도 했지만 속이 많이 상했었습니다.
몇 년 전 같으면 그렇게 티격태격 하면서 함께 민족 공동행사를 준비해 치르고, 이제는 선수끼리(?) 서로를 충분히 알면서, 행사 마치면 통일을 향해 또 한 걸음 내딛는 자리를 준비하는 심부름꾼 노릇을 한 것에 대해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악수해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고 지나가는군요. 더구나 작년에 남쪽 정모는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고, 북쪽의 두 김 형도 작년부터 남북 실무 접촉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궁금합니다. 남북 관계가 다시 풀려 큰 일을 해야 할 때를 위해 어딘가에서 준비하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분단 65년이 다 되어가는 8.15를 함께 맞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은 우리 모두 같을 거란 생각에 더욱 오늘은 두 김 형이 보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가장 멋진 공동행사를 함께 준비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통일의 그날까지 서로 건강하게 견뎌 봅시다.
2009년 8월에 남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