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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낯선사이]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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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6,666회 작성일 14-07-0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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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6일, 지역 생활협동조합 모임에 참석했다. 사회자가 “오늘이 세월호 사건 두 달째”라며 묵념을 제안했다. 묵념 후엔 노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70명의 참석자들은 “선거, 월드컵…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럴수록 더욱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요즘 흔히 듣는 얘기다.

12년 전의 기시감. 2002년 한·일월드컵과 미군 장갑차, 브라질월드컵과 세월호가 함께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폴란드전 승리 후 온 나라가 흥분해 있을 때 경기 양주시에서 미 2사단의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갓길을 걸어가던 중학교 2학년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몸을 깔고 지나갔다. 세월호만큼이나 이 참사도 예고된 것이었다. 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컸기 때문이다. 도로보다 큰 장갑차에서 보행자가 보일 리 없다. 지역 주민들은 사고 이전부터 안전대책을 수차례 당국에 건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이후 월드컵의 열광 속에서 어린 학생의 어이없는 죽음은 전 국민적 죄책감을 불러일으켰고 촛불시위를 당겼다.

월드컵이라고 해서 안온한 일상은 아니다. 카타르에서는 월드컵 경기장 건설 도중 1200명이 넘는 이주 노동자가 사망했다. 2022년 완공 때까지 4000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한다. 브라질 사람들은 모두 축구에 열광할까. 이 완고한 편견은 브라질 사람들의 일상을 앗아갔다. 브라질에서도 12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짓다 1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막대한 개최비용, 물가폭등, 공공요금 인상으로 연일 월드컵 반대시위가 한창이다. “국민의 적 FIFA는 돌아가라”는 시위대에 관광객까지 가세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경찰이 실탄을 발포했다.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누구의 입장일까. 이날 묵념은 내게 작은 상처가 됐다. 그들의 선의와 정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이 두 달이 된지도 몰랐다. “잊지 말자”고 다짐한 적도 없다. 아직 찾지 못한 시신만 생각했다. 개인적 사연과 겹쳐 내겐 ‘세월호’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컴컴한 바닷속 세월호의 연속. 이 시간을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잊지 말자”는 말은 이상하다. 삶이 ‘세월호’인데,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다짐이 필요한가. 잊을 수 없는 이들을 잃었는데 누구를 잊지 말자는 것인가.

‘원전 피해’ 언설 역시 비슷한 경우다. 물론 원전의 재앙은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공유돼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피폭(被爆) 노동자의 존재를 비가시화한다. 그들은 이미 피해자다. ‘잊지 말자’는 다짐은 역설적으로 계속 피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시킨다.

여성주의 국제정치학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다. ‘전쟁과 평화’는 국가 간 갈등이 기준이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국내에서는 매일매일이 “사는 게 전쟁” 혹은 실제 전시상태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쓸모없는 사람(잉여)’으로 모욕과 궁핍 속에 사는 이들도 숱하다. 일상이 곧 정치적 사건인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의 삶은 전쟁과 평화의 구분을 근본적으로 질문한다. 아내에 대한 폭력, 인신매매, 혐오 범죄 등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전쟁 전후가 있을 뿐이다.

‘전쟁과 평화’는 남을 위협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극소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미리 확보하는 안전보장(안보). 하지만 전쟁과 평화는 사람마다 의미가 다른 것이지 반대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평화, 똑같이 전쟁인 상태는 없다. 미국의 군수산업 노동자는 미국 밖에서 전쟁이 계속돼야 고용안정이라는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들의 평화는 분쟁지역 민중들에게는 학살이다.

“잊지 말자”는 배제의 언설이다. 시간이 갈수록 망각은 필연이라는 생각, 그로 인한 죄의식. 그러나 계속 고통스러운 뉴스를 들으며 살 수 없다는 갈등. “잊지 말자”는 잊을 수 있는 사람과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사실 지금 세월호 유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잊지 말자”가 아니라 오히려 “잊어야지, 살아야지”라는 눈물 속의 다짐일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다름을 인정할 때 ‘진정한’ 위로가 가능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시혜가 아니다.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잊지 말자”는 말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경향신문> 정희진 여성학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