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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노동과 복지, 그리고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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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7,084회 작성일 11-09-0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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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노동과 복지, 그리고 여성


장지연(한국노동연구원)

돌봄노동을 사회화한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가족내 여성에게 일임되어 있던 돌봄노동을 가시화하고 공적인 영역으로 옮겨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왜 돌봄노동의 사회화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자신의 힘만으로는 살아나가기 힘든 약자를 누군가 돌보아야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돌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그 기여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시민으로서의 사회적 권리가 주로 자본주의 생산체계 내에서의 직접적인 기여와 결부되기 때문에, 돌봄노동으로 인하여 생산노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 결과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여성주의적 인식은 돌봄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아동이나 노인의 돌봄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여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예컨대, 시장메커니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라고 할지라도 영유아보육이 개별 가족이 전적으로 책임져야할 사안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모든 개인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자유권이라는 소극적인 권리의 시대를 지나 사회권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권리를 인정하는 시대에 들어서 있다. 누구든 사회적으로 용인될만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고, 이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로 인식된다. 무릇 모든 복지국가는 그것이 비록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개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소득보장과 사회서비스 제공을 두 기둥으로 삼아 제도를 구성한다. 이러한 원리에서 보자면, 아동과 노인, 그리고 장애인과 환자는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으면서 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힘이 없으면 죽으라는 정글의 법칙을 채택하지 않는 것이 현대의 복지국가이다.

가족내 여성에게 일임되어 있던 돌봄노동을 사회화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돌봄노동의 가치를 평가하여 국가가 수당형식으로 직접 보상하는 제도도 있을 수 있으며,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회화 할 수도 있다. 돌봄서비스 제공을 하는 경우, 재정지원의 방식과 전달체계의 구축에 따라서 돌봄서비스의 질과 돌봄노동자의 노동권은 크게 달라진다.
돌봄노동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화 할 것인가, 즉 현금급여방식을 취할 것인가 현물급여방식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오랜 논란의 대상이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상태(equity)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평등(equality)을 강조하는 전략, 즉 여성도 남성과 같은 기회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difference)를 인정하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가치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두 가지 전략 중에서 어떤 쪽을 선택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는데, 돌봄노동의 사회화 방식은 이러한 고민의 핵심에 있다.

‘차이’의 옹호자들은 가부장제의 타파는 돌봄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음으로써 가능해진다고 본다. 한편, 평등주의자들은 차이전략이 기존의 성별분업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비판해왔다. 이들은 보편적 여성의 시민권 확보를 위해서는 유급노동을 할 수 있는 권리와 무급의 돌봄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복지시스템을 요구한다. ‘차이’옹호의 입장에 있는 대표적인 정책은 양육수당제도이며, ‘평등’옹호 입장에서는 공공서비스를 통한 아동보육과 노인수발을 요구한다.

돌봄노동의 사회화방식은 결국 여성으로 하여금 가족을 돌보는 역할과 임금노동자로서의 지위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도록 하는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결국 어느 쪽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보상을 해 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필자는 돌봄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어느 정도일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도 가족의 돌봄노동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을 해 줌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해 준 경우는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배경 하에서, 모든 성인은 노동자가 될 수 있어야한다는 ‘성인노동자모델(또는 이인소득자모델)’의 의의는 부정되기 힘들다.
한편, 현실에서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형편이 열악하다는 점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돌봄노동을 사회화하는 것이 계속되어야하겠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대답이 쉽지 않다. 다만, 현재로서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임금이 낮고, 그 중에서도 돌봄서비스 일자리의 임금수준이 낮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떤 서비스 전달체계를 구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언급하고싶다.

우리나라는 보육, 노인장기요양, 그리고 기타 사회서비스 전영역에서 시장메커니즘(영리조직)을 이용하면서 재정만 국가가 지원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돌봄의 사회화를 위한 제도설계의 과정에서 돌봄서비스 종사자의 권리나 일자리의 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1980년대가 제조업에서 ‘소비자주권’이 강조되었던 시기라면 1990년대에는 이것이 서비스업에까지 전이되었으며, 현재는 돌봄서비스의 영역에서도 소비자 주권과 선택권에 대한 강조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일회성 서비스와는 달리 돌봄서비스는 장기간의 안정적 관계를 갖는 경향이 있고, 우월한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갖기도 어렵고, 근접성이 서비스의 질보다도 더 중요한 선택기준일 수 있는 특수한 서비스이기 때문에 선택권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음에 불구하고, 이러한 점을 돌아보는 논의는 보이지 않았다. 돌봄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서비스제공자 간에 경쟁이 있어야하고 소비자는 선택권이 있어야한다고 하는 논리가 다른 모든 논리를 압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공공부문에서 서비스를 직접 공급하는 대신, 민간시장을 활성화하고 정부는 재원을 부담하되 돌봄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이용권(바우처)을 지급한다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보육지원과 장기노인요양보험제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폐해는 돌봄서비스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전혀 보호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심지어 장기노인요양보험제도의 도입 초창기에는 요양보호사에게 사회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근로기준법으로 보호하는 노동자로 볼 것인가 여부까지 논란이 될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건강보험공단이 요양보호 서비스 참여 업체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 제시한 가이드라인에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하는 규정이 버젓이 들어가 있는 정도이다. 민간영리업자를 통해서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 하에서 돌봄노동자의 임금이나 근로조건이 열악해진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국공립보육시설과 민간영리시설에서 종사하는 보육교사의 임금 및 근로조건의 차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돌봄노동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화하느냐는 여성의 노동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가족을 돌보는 여성에게 수당을 주는 방식보다는 돌봄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돌봄서비스를 확대함에 있어서는 시장매커니즘을 이용하면서 국가는 재정만 담당하는 현재와 같은 방식을 탈피하여, 서비스 전달체계를 공공화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