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헌신과 희생을 여성에게만 강요하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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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723회 작성일 23-06-05 16:20본문
지난 3월 23일 <오마이뉴스>는 대전시인권센터의 수탁기관이 변경되면서 기존의 모든 사업이 중단된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4월 27일 <연합뉴스>도 대전시인권센터가 발행한 <대전인권신문> 57호에 실린 성차별적 발언들에 대한 논란을 보도했고, 같은 날 <한겨레> 역시 <대전인권신문>의 젠더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반인권적 발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문제가 된 <대전인권신문> '전문가 기고'란에서 한남대 행정학과 이형우 교수는 "성역할 인식과 자연권"이라는 제목으로 인권은 천부인권이며,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민 다수의 자연권이 침해당하고 있으며, 여성의 돌봄이 천부적이라고 주장한다. 본 글은 이형우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이다.
천부인권사상'이라고요?
이형우교수는 1) 인권이 "자연권"에 기초하며 "출생 시부터 가지는" 이 자연권은 "초월적 존재인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천부인권사상"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형우교수는 2) 자연권이 "지나치게 확장되어", 소위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 다수의 자연권이 침해"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하나씩 살펴보자.
일단 그가 주장한 "천부인권사상"부터 살펴보자. 이형우 교수는 천부인권사상을 신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각별하게 창조하고 다른 동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특별한 권리를 인간에게만 부여했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천부인권사상과는 좀 다르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권이란 선천적인 자연의 권리이라고 주장했지만 이형우 교수는 신이 인권을 주었다고 주었다고 해석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작은 부족 유대인의 신화를 담고 있는 <창세기>에서 신은 아담에게 만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땅끝까지 번성하라고 명한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출현한 신화(神話)다. 신화를 역사로 착각하는 일부 사람들은 인간이 만물을 규정하고 정복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지닌다는 원리를 여기서 추출해 낸다.
인간은 과연 만물의 영장일까? 인간은 과연 다른 동물에겐 없는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최근 포스트휴먼 담론을 상기한다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아니요'다. 인간의 자의식과 지성이 다른 동물에 비해 우월한 것은 맞지만, 자의식과 지성만이 비교의 절대적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의 우월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배타적 권리를 지닌다는 오만과 착각 때문에 지금 지구가 이 지경이다.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2050년까지 지구 생물의 반쯤이 멸종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21세기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기라성같은 학자들,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캐런 버라드 등등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 네트워크를 주장하면서 인류가 당면한 절멸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존중적 존재론과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주장한다. 또한 생물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기독교의 창조론은 "아동학대"라고 일갈한다.
그런데도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연적 인권이 있다는 말은 여전히 지구의 역사를 인간중심적, 아전인수로 파악하는 명백한 오류다. 이런 인간관은 마치 천동설을 주장하는 세계관만큼이나 고루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돈다고 믿을 자유가 보장된다고 말하지 말자. 신화를 역사로 오독함으로써 지식 공동체가 이미 확증한 사실을 부정하면서 그것을 믿음의 자유라고 감히 말하지 말자.
주지하다시피 자유는 타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 맘대로 행동할 수 있는 무조건적 허용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과 합의를 지킬 의무를 전제로 한 조건적 허용이다. 물론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수두룩하다. 그렇다해도 이미 확증된 명제조차 부정하려는 태도는 반지성적이다. 천부인권사상의 인간관은 인간이 신이 창조한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만물의 영장 인간이 성취한 눈부신 과학적 성과는 송두리째 부정한다. 이는 이율배반적이고 반지성적이다.
수많은 과학 천재들이 밝혀낸 137억년 우주의 역사, 49억 년 지구 행성의 역사, 35억년 생명체의 출현, 700만년 전 유인원 역사의 전환을 마련한 두 손 쓰기를 시작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수천 점 화석, 이 엄연한 과학적 사실을 마냥 헛소리라고 할 것일까?
과학 만능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위의 숫자들은 계속 변화한다. 그만큼 과학적 사실들은 계속 수정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 종은 지구상에 생명체가 생겨난 이래 수없이 명멸했던 지구 행성의 생명체 중 하나의 종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상에 출현했던 생명체의 99,99%(진 마굴리스와 칼 세이건)는 현재 지구상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종도 언제든지 그들처럼 사라질 수 있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인류세라는 지질학적 시대구분은 만물의 영장 인간이 지질학 존재로서 지구 행성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망가뜨린 지난 만년 정도의 시기를 지칭한다.
지구의 역사에서 지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종은 인류가 처음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 25억년 전쯤 남세균은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광합성을 완성했고, 이로 인해 지구를 위험한 가스로 오염시켰다. 그 위험한 가스가 바로 산소다. 당시 혐기성 미생물들이 주종이었지만, 이들은 산소 오염으로 모두 멸종했다. 하지만 그 덕에 인류가 진화한다. 산소 덕분에 결국 인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외부의 충격이든 내부의 변화에 의하든, 지구환경이 변화한다면 인류는 언제든지 소멸할 수 있는 존재다.
지구생명체 중 하나로서의 인간, 소멸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런 인간관만이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의 진정한 매뉴얼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특별한 권리를 지닌다는 종래의 인간관은 그 우월감과 오만함으로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인종과 성과 계층과 물질을 타자화하여 가차없이 정복하고 식민화했다. 지금 천부인권설은 고루하고 시대착오적인 퇴물이다.
인간을 지질학적 관점과 생명체 전체의 지구행성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천부인권은 없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스피노자 방식으로 우주 전체를 하나의 신으로 보고 그런 신으로부터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권리라는 것이 정녕 있다면, 그 권리는 인간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라 우주에서 출현했다 스러지는 모든 존재들--생명체와 비생명체를 포괄하여—모두에게 주어질 것이다.
인간은 소중하다. 만물의 영장이라서가 아니라 지구 행성 안 모든 존재들이 빠짐없이 소중하기에 소중하다. 한때 백인/중상층/비장애/남성만이 인간으로 여겨졌던 시대가 있었다. 그들만이 인권을 지닌다고 여겼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인권은 유색인/비중상층/장애/여성에게도 확대되었다. 더불어 지금은 인간이 소중한 만큼 다른 생명체도 소중히 여긴다. 권리의 개념은 인간을 넘어 비인간에게도 확대되고 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비인간체의 존중은 필수적이다.
그런데도 이형우 교수는 자연권이 "지나치게 확장"되었다고 말한다. 소수자에게 "지나치게 확장"되는 바람에 다수가 피해를 본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사용하는 "지나침"이란 단어는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까지 자연권이 확대되고,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에게까지 천부인권 자연권이 확대되며, 비인간(동물, 식물, 사물)에까지 자연권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로 읽힌다.
인권을 유색인/비중상층/장애/여성에게 확대하기를 꺼렸던 18세기 계몽주의 지식인들처럼 아직도 이형우 교수는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되고 천부적 권리를 지니는 인간은 남성/백인/서구인/비장애인/이성애자/지배계층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즉 여성/유색인/비서구인/장애인/동성애자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일까?
이들 "소수자"가 국민 다수의 "자연권"을 침해하는 소수집단으로 여기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인류가 인권 적용의 범주를 확대한 것은 인류가 성취한 눈부신 진보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과 상호존중의 확대라는 목표를 향해 인류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과 상호 존중의 확대는 진보이고, 이 진보를 발목 잡는 이들은 수구다.
자연적/보편적 원형이라고요?
이형우 교수는 "인간의 인식과 기억이 원형(prototype)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회상 역시 원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비록 새의 종류가 여러 가지여도 '새'라는 언어적 개념을 아이가 터득하는 까닭은 '새'의 원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편재하는 보편적 원형으로 인하여 우리의 사유와 소통이 가능하고, 그렇게 사유하고 소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새"라는 소위 "개념적 원형"은 문화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새"라는 언어적 원형은 한국에서는 까치나 참새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지만, 사막의 한 가운데 사는 누군가는 "새"라는 단어에서 "독수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펭귄을 흔히 보았던 사람은 펭귄을 새의 원형으로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형우 교수가 "새"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것은 새의 원형이 보편적으로 편재함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원형을 공유하는 인간의 범주는 생각만큼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다. 물론 보편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제각각 입맛이 다르지만, 대다수가 선호하는 맛집이 있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편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보편성은 절대로 절대적이지 않다. 제아무리 맛집이라고 해도 그 맛집을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으니까.
그러므로 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원형이 있긴 있지만, 공유하는 원형은 그룹별로 다르고, 그룹 내에서도 결코 절대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통계적으로 대다수의 생각을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통계적 소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거나 다수의 규범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또한 특정 그룹 안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원형이 있다해도 그 원형은 원래부터 혹은 본질적으로 공유한다기보다는 대대손손 긴 시간에 걸쳐 유전적으로 또는 환경적으로 '구성된' 공유다. 칼 융이 인간의 무의식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원형(archetype)를 이론화하지만, 그 원형 역시 인간의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지식들이 생명의 역사 전체에 걸쳐 켜켜이 쌓여온 결과물이다.
즉 원형은 존재하지만, 그 원형은 구성된 것이고, 문화와 시대마다 변화한다. 원형이 원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결국 원형도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다.
이형우 교수는 "자연스럽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지만 "자연법"이라는 말 안에 "자연스러운" 법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무엇이 '자연적'인가. 자연과 같으면 자연스러운 것인가? 하지만 "자연스럽다"라는 말 자체가 실은 정치적이다. 즉 "자연스럽다"라는 개념 자체가 권력 관계의 소산으로써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자연스럽다"는 개념이 왜 정치적일까? "자연스러움"과 "비자연스러움"을 구분하는 잣대가 바로 특정한 권력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특정한 권력의 하나는 서구 이천 년을 지배한 기독교 이데올로기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시조인 예수를 사랑한다. 그는 40일간(물론 상징적 숫자이겠지만) 사막에서 금식과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신비를 체험한 신비가이며, 전쟁과 증오와 보복으로 점철된 지구 행성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려 했던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서구의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배신했다.
기독교의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진보를 발목 잡는 수구 집단이 되어 버렸다.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이렇다. 일부 기독교인의 고루한 인간관과 세계관은 앞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주로 요즘 논쟁이 되는 동성애 문제와 관련해서 말하려고 한다.
일부 기독교인은 1)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 양성을 창조했고 양성이 신의 뜻이며 "자연스럽다", 2) 섹스는 남녀 간에만 이뤄지는 것이 신의 뜻이고 "자연스럽다", 3) 섹스는 즐거움이 아니라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양성(two sexes)이 과연 "자연스러울"까?
기독교인들은 양성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양성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자연의 법칙이 곧 신의 법칙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까닭이다. 하지만 자연은 놀랍게도 퀴어로 넘쳐난다. 남녀 이분법적인 양성으로 범주화되지 않는 존재들이 수두룩하다.
사카오 사람들은 성기 모양에 따라 젠더를 두 개가 아니라 일곱 개로 나눈다. 곰팡이 속에 속하는 버섯은 2만 8000개 종류의 성을 가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브라운대학 생물학과 교수인 앤 파우스토-스털링(Ann Fausto-Sterling)은 인간의 성(sex)을 다섯 개로 분류하고, 흔히 남녀 이분법에 해당하지 않는 세 개의 성이 전체 인간의 1.7%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인구로 계산하면 대체로 천안 규모의 인구가 남녀 이분법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자연스럽다" "보편적이다"라는 말은 일부 혹은 다수를 지칭할 뿐 결코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자연은 양성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연에는 남녀 양성만이 존재한다고 우기고, 양성에서 벗어나는 인간 1,7%의 존재를 비존재로 여기는 것은 이성애중심주의 정치학의 산물이다.
번식을 위해서는 암컷과 수컷의 섹스만이 자연스러운가?
흔히 암컷과 수컷이 섹스/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써 자연 속의 동물과 식물들이 암컷과 수컷의 합체로 번식함을 제시한다. 그러니 인간도 남녀가 섹스하고 번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의 번식은 반드시 암컷과 수컷의 합체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외는 풍부하다. 자연에는 퀴어로 가득하다. 브루스 베게밀의 <생물학적 풍부함>과 조안 러프가든의 <진화의 무지개>에 따르면, 일부 도마뱀 종은 오로지 암컷만 있고, 암컷끼리 섹스하여 단성 생식한다. 생물의 역사에서 유성 생식이 도입된 것은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의 편의상 암컷끼리 섹스하고 번식하는 경우가 대다수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예외적 도마뱀이 자연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흔히 기독교는 섹스가 기본적으로 생식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더욱더 남녀 간의 섹스만이 자연스럽고, 동성애 섹스는 생식이 불가능하므로 자연스럽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에서 동성 섹스로 번식이 가능하다는 엄연한 사실은 남녀 섹스만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할 근거를 상실케 한다. 그런데도 남녀의 섹스만이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성애중심주의라는 오랜 권력 작동의 결과일 뿐이다.
섹스는 번식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을 신이 부여한 특권을 지닌 존재라고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섹스는 동물 수준으로 격하하여 인간도 동물처럼 오로지 번식을 위해 섹스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물도 즐거움을 위해 섹스한다. 수많은 예들이 풍성하게 존재한다. 보노보는 성적 쾌락을 위해서 원하는 성행위의 체위를 손동작으로 제안하고, 자위를 위한 도구를 조작하기도 한다.
하물며 인간의 섹스는 번식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인간도 동물도 모두 친밀감과 즐거움을 위해 섹스한다.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중성화 수술을 받은 반려견들이 성적 쾌감을 추구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비생식적 성애와 친밀감의 예들을 보여준다. 친밀감과 즐거움을 위한 섹스는 대다수 이성 간에 이뤄지지만, 이성 간의 권력관계로 인하여 이성 간 친밀감의 형성이 불가능하다면 동성 간에도 가능하다.
동성애는 1500종이 넘는 동물에서 발견된다. 자연이 이성애이기 때문에 인간의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주장은 근거가 허약하다. 그런데도 번식이 불가능한(불가능하지 않는데도) 동성애를 '부자연'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성애중심적 정치학의 산물이다.
거친 일반화를 통해 귀납된 보편성을 규범으로 연역하는 것은 위험하다. 거칠게 일반화된 진술에 속하지 않는 개별자에게 보편성을 규범으로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자연스러움"도 거친 일반화다. 더할 나위 없이 다양하고 풍성한 자연을 "자연스러움"으로 귀납하여 이를 규범화하고 이 규범에 순응을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다.
여성이 원래 돌봄에 능하다고요?
여성이 지금 당장 남성보다 돌봄에 능할 수는 있다. 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랫동안 여성이 돌봄의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특정한 일을 담당하면 누구든 능숙하게 그 일을 해낸다. 여성이 아이를 현재 더 잘 돌보는 것은 오랫동안 여성이 그 일을 담당했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본질적으로 돌봄에 능한 것은 아니다. 모든 능력은 계발되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이 역할이 능력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의 돌봄 능력이 여성의 천부적인 재능인 양 떠들면서 여성의 역할을 돌봄에 한정 짓고, 여성의 개인적 욕구와 성취를 가로막는 역할 분담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다. 여성은 원래 돌봄에 능하다, 여성은 원래 모성이 강하다, 여성은 원래 신체적으로 돌봄에 적합하다, 여성은 타고난 집안의 천사다, 등등의 거친 일반화와 잘못된 보편주의가 바로 젠더고정관념이다.
이타적인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돌봄은 여성에게 맡겨버리고, 남성은 자기 욕망을 성취에 몰두하면서 여성은 원래 돌봄을 좋아하니 잘하니 어쩔 수 없다고요? 원래 내재된 재능을 발휘할 뿐이니 공평하다고요? 물론 사람에 따라 원래 돌봄을 좋아할 수도 있고 헌신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의 욕망은 아니다. 함부로 일반화시키지 말라.
인구절벽의 심각성에 다들 아우성이면서도 그에 대한 정부 대책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출산 수당 몇 푼 준다고 젊은이들이 애를 낳겠는가. 인구절벽은 이 사회가 육아에 관심이 없고, 육아를 하고 싶을 만큼 건강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고, 육아가 개인의 성취와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독립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구절벽은 젠더고정관념 때문이고 정치의 실패다. 젠더고정관념이 사라지고, 온 사회가 육아를 공동 부담할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전환한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전 지구적 관점에서 과연 인구가 증가하는 것이 맞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리는 기술적(descriptive)인 것과 규범적(prescriptive)한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대다수의 아프리카인이 현재 가난하다는 현실 기술이 그들이 가난해야 한다는 당위로 둔갑해서는 안된다. 대다수의 아프리카인이 가난한 것은 다양한 요인들이 결합한 총체적인 결과이다. 서구의 침탈이 한 원인일 수 있고, 자연을 정복하기보다 자연과의 조화를 최선의 가치로 삼았던 그들의 문화 탓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현재 돌봄에 능하다는 현실 기술이 갑자기 여성이 돌봄을 맡아야 한다는 규범으로 둔갑해서는 안된다. 오 천년 강고한 가부장제의 그늘에서 여성이 돌봄에 능해졌다고 해서, 돌봄에 대한 짐짓 여성의 적합성이 여성의 본질은 아니다.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돌봄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돌보는 헌신과 희생은 아름답다. 그러나 헌신과 희생을 여성에게만 강요하지는 말라.
김명주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일반대학원 협동과정 여성젠더학과 겸무교수, 대전인권센터 교육위원, 대전여민회 이사, 딸 넷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