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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회지-지금우리는!] 슬럼독밀리오네어와 워낭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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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8,574회 작성일 09-09-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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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밀리오네어와 워낭소리

권선필(목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얼마 전 할리우드에서 있었던 2009년 아카데미 작품상으로 ‘슬럼독밀리어네어’라는 영화가 선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이 본 모양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니 도일이 감독한 영화이다. 감독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광고영화를 만들던 사람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을 간파하고 그것을 눈에 확띄는 장면을 담는 이야기를 가지고 풀어가는 특징이 있다. 이미 ‘트레인스포팅’에서 감독의 그러한 재능을 잘 보였준 바 있다.

  할리우드에서 비행기로 열 시간 넘겨 걸릴 정도로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에서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의 주제는 당연히 ‘워낭소리’이다. 최근 관람객수가 200만을 넘어섰다는 것이 큰 뉴스가 되었다. 저예산으로 독립영화로 또 다큐멘터리로 이러한 성공을 거둔 것은 한국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금기와 벽을 깬 영화이다.
 
  아놀드 하우저가 말하듯이 영화를 포함한 예술들은 사회의 거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슬럼독밀리오네어’와 ‘워낭소리’에서 지구촌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변화코드를 읽어낼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 “내적 세계화“라는 한 가지만 생각해 보자.
 
  전혀 다를 내용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둘다 대중적인 성공을 한 영화인 ‘슬럼독밀리오네어’와 ‘워낭소리’는 한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 두 영화가 자막을 필수적인 요소로 가지고 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영화자막은 그리 낮설지 않은 익숙한 소통수단이다. 수많은 외국 영화들을 우리가 편안히 이해하고 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이 자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영화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자막에 대해 갖고 있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워낭소리’는 사실 그 소재나 등장인물이 같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자막이 전혀 필요없을 것 같은 영화이다. 하지만 자막이 없이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일상적인 말과 거리가 있는 말을 주인공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사용하고 있다. 보통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말이라면 굳이 자막을 넣을 필요가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일일이 작업을 해서 화면에 글로서 대화를 대신 표현하였을 것이다. 결국 같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리고 한국사람의 말이지만 같은 한국사람이 알아듣기 힘든 말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슬럼독밀리오네어’ 역시 자막이 필수적인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영국사람이 감독하고 다국적 자본이 돈을 대고 세계적 영화상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나 골든그로브에서 상을 탄 영화지만 사실상 인도영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인도사람이고 배경이나 사건이 인도 뭄바이의 빈민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영어보다도 오히려 인도사람들이 쓰는 힌디어를 일상적을 쓰기 때문에 자막이 없이는 전달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워낭소리’나 ‘슬럼독밀리오네어’나 주류사회 속에서는 언어조차 통하지 않아서 결국 자막이 없이는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백만의 관객들 동원하고 있으며 영화의 본고장이라할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상을 탓다는 점에 주목한다. 결국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주류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주류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모두가 소수자만 남은 다원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가장 한국적이라 할 수 있는 농촌에서 평생 농사를 지어온 농부와 그의 소가 소수가 되었다. 이 영화를 만든 독립영화인들도 인기를 얻어서 주류사회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소수일 뿐이다. 이 영화를 보러온 수많은 관객들 중에는 그동안 영화관이라고는 와본적이 없는 오십대 이상의 연령층도 여전히 영화세계에서는 소수일 뿐이다. 그 동안 극장을 독차지하던 이십대의 ��은 청춘들도 이 영화를 보면서는 할 수 없이 소수로 전락하고 만다. 워낭소리를 보면서 앉아있는 모든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지배적 다수를 만들어 내고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이다.

  ‘워낭소리’와 ‘슬럼독밀리오네어’를 보면서 이제는 자막과 같은 또 다른 의사소통 수단의 도움이 없이는 충분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내 옆에 있는 가족이나 동료들 혹은 이웃들과 그저 말을 하면 뜻이 통하리라고 생각하던 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다. 서로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한국말로 대화하던 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자 한다. 잘 통한다고 전제하고 하던 모든 의사소통이 사실은 오히려 의사소통 단절의 원인일지 모른다는 반성과 아울러 이제는 기존에 하던 의사소통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을 배워야만 하겠다.

  또한 그동안 너무 익숙하게 꿈꾸어 왔던 다수를 꿈꾸는 일도 포기해야할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다수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다수는 결코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도 쉽게 바뀌는 다수를 기대하거나 꿈꾸기는 것을 포기해야겠다. 오히려 우리는 다같이 소수자들이라는 점을 늘 인정하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더 사람답게 그리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