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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글] 코로나 탓 방콕 휴가 어떤 책 읽으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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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1,062회 작성일 20-08-3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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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성폭력 깨닫는 데 3년이나 걸린 이유

 

어떤 부부가 친밀할까?

 

14년 전 신혼이던 때 일이다. 관심 있는 주제로 기말페이퍼를 쓰라는 교수님의 과제물 독촉을 받았다. 남편 탓에 속 끓이는 친구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친밀한 부부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 슬그머니 궁금증이 올라왔다. 곧바로 주부들을 찾아 나섰다. 인터뷰를 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는데, 바로 갈등을 빚고 있는 여성들의 많은 수가 결혼 전 원치 않는 성관계를 경험했다는 점이었다. 친밀성이 깨지는 경험이었을 텐데 명확하게 감정을 표현 못 하는 주부들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데이트 폭력으로 보였는데, 아무도 그 경험을 폭력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주체 못 해 한 일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현재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말했다. 남편이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 전 성적 행동을 강제로 했을 때 이미 예상된 일인데, 그 인과관계를 깨닫지 못하는 듯해 안타까웠다.

 

그 뒤로 많은 엄마를 만났다. 결혼생활의 햇수가 늘어날수록 다양한 주부들을 만날 기회가 늘어났다. 교회나 동네 모임 등 다른 장소에서 만난 엄마들이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비슷한 경험이 툭 튀어나오곤 했다. 폭력이 아닌 지나치게 사랑해 일어난 일로 미화되어서 말이다.

 

물론 최근 들어 성폭력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하지만 주목을 받는 성폭력의 내용은 대개 괴물들이 저지르는 아동 성폭력이다. 위와 같이 데이트 중에 일어나는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라고 쉽게 받아들인다.

 

 

 

 

 

▲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는 그런 점에서 주목받을 만한 책이다. 책의 저자인 로빈월쇼 자신도 데이트 성폭력의 피해자다.

 

자신의 경험이 데이트 성폭력임을 깨닫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가해자가 과거에 성관계한 적이 있는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강간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피해를 분명하게 자각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 바로 데이트 성폭력의 특징 중 하나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매우 과학적이고 방대한 연구 결과물을 토대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가장 기초가 됐던 자료는 아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연구물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설문조사 연구물이다. 바로 <미즈>와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연구진들이 1984년 324개 대학 6159명을 설문 조사한 연구다. 그는 이에 더해 인터뷰를 다양하고도 치밀하게 진행해 1988년 <I never called it rape>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을 읽다 보면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발간된 책인데 '현재' 우리의 이야기와 놀라우리만치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성들의 경험이 보편적이란 이야기다.

 

이 책은 성폭력 의식에 도전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여성 응답자 4명 중 1명꼴로 법적 의미의 강간 혹은 강간 미수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성폭력의 가해자 중 86%가 아는 사람이다"(14쪽)란 사실이 그렇다.

 

당시는 성폭력을 모르는 사람이 저지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어두운 길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와 입을 틀어막고 흉기로 위협하며 억지로 하는 행위. 그것이 성폭력이었다. 이런 점에서 로빈월쇼의 책은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는 데이트 성폭력, 친근한 사람 사이의 성폭력을 논할 때 늘 따라붙는 피해자 비난에 대해서도 말한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죠."

"애초에 뭘 기대한 거죠? 어쨌든 그 남자 집에 간 거잖아요."

"그건 강간이 아니에요. 강간은 모르는 남자가 여자를 붙잡고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거라고요."(P.36)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원하지 않는 행동을 억지로 한 그들이 문제지 아는 사람을 믿고 따라간 피해자가 문제가 아니라고.

 

흔히 친근한 사람 사이의 성폭력은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충동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통념이다. 현실은 반대다. 철저하게 계획해서 성폭력을 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수많은 사례를 보면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결국 성폭력의 원인은 남성들이 학습한 남성성과 관련 있다.

 

피해자에게 흔히 하는 또 다른 비난은 총을 들이밀거나 다칠 정도로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닌데 왜 소리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성폭력 운운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답은 명확하다.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배려하느라 아무 말도 못 한다는 것. 여성이 사회화되는 방식을 생각하면 이런 행동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가해자가 연인이 아닌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자신을 강간하리라 생각하지 않아서다. 상대를 믿다 보니 상황의 위험성을 눈치채지 못해 도망갈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친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 될 때는 이미 힘에서 밀리기 때문에 도망갈 수 없다. 믿는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라 더 충격적이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경우도 많다. 결국 성폭력은 우리 사회에서 학습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결과란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은 4장에 걸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사건의 실태, 피해자들의 7가지 반응과 그 의미, 가해자들의 성 관념과 행동 양식, 집단 성교의 피해자 집단이 되는 10대 아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성폭력을 학습하고 정당화하는 사회를 성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성폭력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안도 들려준다.

 

지인이 내게 "아는 사람 간의 성폭력의 실태를 너무 생생하게 보여줘 충격을 받았다"며 권한 책이다. 나도 읽으면서 동감하였다. 이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나도록 남자를 만나는 것이 멈칫할 정도로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성폭력 피해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아는 사람 간의 성폭력은 여성이 사람에게 가졌던 신뢰를 무너뜨려 이후의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준다"고.

 

우리 주변에서 성폭력이 왜, 어떻게 발생하는지 원인과 실태를 잘 보여준 이 책을 자녀를 둔 학부모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연애 중인 혹은 연애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남녀가 관계에 대해 소통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다만 성폭력이 술을 마실 때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며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술을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P.244)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성은 옷차림에 신경 써야 한다는 말처럼 강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왜곡된 관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