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여진> 6월호 논평 '왜 “빡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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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165회 작성일 24-06-25 14:38본문
왜 “빡친” 걸까?
“요즘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억압’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빡친’(upset) 거죠. ‘우울한’(depressed) 거에요.”
2024년 6월 15일 한국여성학회 기조 발표에 나선 연세대 인류학과 나임윤경 교수의 말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약 오륙 년 전부터 흑/백, 빈/부, 녀/남, 주변/중심 등등 권력 구조 비판을 해석틀로 하는 나의 문학 수업 시간에 자주 등장하기 마련인 “억압”이란 단어에 학부 학생들이 반응하지 않았다. 나를 울컥하고 결연하게 만들던 단어들에 무덤덤한 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진정 ‘졸업’할 때임을 쓸쓸하게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학생들은 “억압”이 내포하는 이분법적 대적 상황이 이젠 시대착오적임을 직감하였을 뿐, 무수한 ‘부당함’(경우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의 ‘빡침’과 ‘우울함’은 부당함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왜 “빡친” 걸까? 오늘날의 부당함이 더 이상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의 부당함은 비교적 단순해서 싸울 대상이 분명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브르조아에, 유색인종은 백인에, 여성은 남성에, 주변부는 중심에 대항해서 싸우면 됐다. 그런데 지금은 대상이 모호하다.
권력의 구조들은 여전히 강고하면서도 미세하고 비가시적이다. 또 권력 구조 자체가 뒤섞여 교차적이고 다층적이여서 누구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투쟁의 대상이 불분명하다. 불분명한 가운데 대상을 적시한다해도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상대는 강력하다. 그래서 빡치고 우울하고 또 무력해지기도 한다. 이도 저도 다 뿌리치고 안락한 소시민에 만족하기도 한다.
아렌트적 정치적 삶이 필수라면 우리는 어떻게 젊은 세대의 ‘빡침’을 정치화할 수 있을까? 바리케이트적 상상력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일단 나임윤경교수 덕에 질문은 명확해졌다. 답에 적어도 한 발 다가선 셈이라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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