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떠밀려 반장 됐다가 인생 바뀐 거죠" -대전여민회 김경희 대표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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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2,669회 작성일 06-08-03 16:54본문
쌍둥이 딸이 태어난 지 5개월쯤 되던 1995년 겨울. 김경희씨는 아이를 업고 신문을 보다가 깜빡 졸았다. 졸음에서 깨어난 순간,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과 아이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최소한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니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피아노. 악보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여건은 되지 않았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았다. 그녀는 당시 함께 살던 시어머니를 설득했다. 지금 내가 피아노를 배워서 두 아이를 가르친다면, 시간과 돈을 절약하고 훨씬 더 교육적일 거라고. 듣고 있던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배워라!"
바이엘 상권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피아노학원 강사가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엄마들이 처음에는 열의를 가지고 배우지만 꾸준히 하는 사람이 드물고, 시댁과 친정의 대소사 때문에 한 번씩 빠지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선생의 그 말을 뒤집고 하루에 한 번도 모자라 아침저녁 두 번씩 교습소를 들락거렸다.
김경희(45, 대전여민회 공동대표)씨는 하고 싶은 것은 꼭 하는, 그렇지 않으면 병이 나는 열혈 아줌마다. 대학 졸업 후 결혼으로 평범한 길을 가고 있던 김경희씨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도 그 못 말리는 열정과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아파트 반장'"
그의 본성이 아낌없이 발휘된 것은 아파트 반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대전 토박이로 결혼 후 우여곡절 끝에 대출을 받아 마련하게 된 아파트. 삭막하다고 하는 아파트 생활에서도 그녀는 좀 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게 그렇게 불편하더라고요. 이웃 꼬마를 만나도 몇 살인지, 몇 호에 사는지 물어보고 잘 가라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죠. 그런 걸 보고 사람들이 친근하게 생각했는지 같은 라인 사람들이 반장을 하라고 부추기더라고요."
졸지에 반장이 된 그녀는 이왕 하는 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게 일을 풀어나가자고 맘먹었다. 반상회를 하기 전, 게시판에 마음을 움직이는 한 줄의 시나 의미 있는 글, 주부에게 정보가 되는 글들을 붙여놨다. 벌금 물리지 않으면 사람 하나 모이지 않는다는 반상회에 사람들이 제법 모이기 시작했다. 게시판의 글을 보고 "한 번 와보고 싶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상회가 활성화되자 참석 여부에 따라 회비를 걷었다. 회비를 모아 그때 한창 유행이던 반찬용기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삭막한 아파트, 우린 이렇게 극복했어요"
그 다음 김경희씨는 부녀회장을 맡게 됐다. 물론 그것도 의도한 건 아니었다. 부녀회장을 뽑는 자리에서 얼떨결에 사회를 맡았다가 부녀회장을 염두에 두고 있던 사람 대신 그녀가 부녀회장에 당선된 것. 얼떨결에 부녀회장이 되긴 했지만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부녀회장은 있는데 회원은 없더라고요.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고 싶어서 또 게시판에 회원모집 공고를 붙였죠. 그렇게 해서 40여 명의 사람이 모였어요. 회원들이 각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맡고 그렇게 부녀회 활동을 시작했죠."
김경희씨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대전 파랑새 아파트 부녀회장을 하며 아파트 공동체라는 새로운 실험을 하게 된다. 콘크리트 아파트에 정이 오가면서 메말라가던 사람들을 자매애로 뭉치게 했다. 가장 신났던 일은 바로 벼룩시장.
벼룩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주부들은 식구들의 먹을거리 장만에서 해방됐다. 김밥을 팔 때 엄마들은 집에서 쓰는 김말이를 하나씩 들고 나와 김밥을 말아 놓고 다시 집으로 가 볼일을 봤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1000원짜리 엄마손 김밥. 요즘 팔리는 1000원짜리 김밥의 원조라고 김경희씨는 웃었다.
부녀회 일하는 재미를 알게 된 아줌마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치를 잘 담그는 회원은 직접 장을 보고 김치를 만들었다. 김치값도 시중보다 싸서 주민들의 호응도도 높았다. 이런 일들이 이어지면서 아파트는 재산의 의미가 아니라 인정미 넘치는 삶의 공간으로 변화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 '~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잖아요.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가령 아이가 어려서 문제가 된다면 아이가 어린 만큼 자기가 움직이면 되는 거죠. 미루기만 하면 절대 못해요. 아이가 어려서 못하는 일을 그 아이가 크면 할 수 있을까요? 컸기 때문에 또 못하는 거죠."
한창 부녀회 일에 재미를 느낄 때쯤 김경희씨는 대전여민회에서 활동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1987년 12월 창립한 대전여민회는 여성의 권익신장, 양성평등사회실현, 여성평등 노동관 확보를 위한 법률제정과 개정 등 고용평등 환경조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97년 즈음의 대전여민회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인해 개점 휴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죠. 나가서 전화라도 받고 있으면 누군가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보험 외판원이 상품을 팔 듯이 제일 친한 친구부터 찾아가 여민회에 대해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죠."
김경희씨는 사람들이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만을 요구했다. 친구들 중에는 돈이 있는 친구가 있었고, 아이디어가 뛰어난 친구들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 친구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 "너는 돈이 있으니까 회비를 내라" "너는 가치판단을 잘하니까 회의 때 좋은 의견을 내라"는 식으로 말이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기꺼이 김경희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모이는 사람들의 연령이나 고민도 다양했지만 조금씩 일을 하면서 단체를 추스르기 시작했다. 이때 김경희씨는 또 하나의 도전을 하게 된다.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체계적인 조직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행정학 공부를 시작했죠.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요. 그때 쌍둥이가 만 세 살이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어머님들, 스스로의 인생을 발견하세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당했던 일들과 6남매의 막내로서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고민과 혼란도 몰려왔다. 대학에 다닐 때 학생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여성으로서 특별한 의식을 지녀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줌마 김경희가 변하는 순간이었다.
"여민회 활동을 하면서 '내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나 할까요? 이 일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을 거예요."
대전여민회는 지금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다. 재활용 가게인 '보물창고'과 어린이 책사랑방 '도토리', 어린이 책잔치, 주민강좌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여성을 위한 문화활동과 양성평등 교육을 하고 성인권활동, 평화통일 실현활동 등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전지역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힘이 되도록 힘들고 어려운 여성들의 언니 역할을 착실히 해 나가고 있다.
"여성들이 주로 모이는 공간이라 그런지 정으로 친해질 수밖에 없어요. 대학에 강의 나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게 저한테는 재산처럼 여겨져요. 처음 여민회 찾아와서 말을 잘 못하는 회원이 점차 자기 의견을 개진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이 눈에 띌 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
대전여민회에는 각종 소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연극모임의 경우 회원들이 직접 대본 작업을 해서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한 회원은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분야에 당선되기도 했다고.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기 안의 내적 동기가 여민회를 통해 발현된 것이다.
아줌마들의 수다모임이라고 치부되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시작된 김경희 대표의 항해는 계속되고 있다.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닌 의견과 역할을 나누며 스스로 새롭게 발견해 가면서 살아 움직이는 게 바로 삶임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글/사진_한미숙 오마이뉴스 기자
여건은 되지 않았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았다. 그녀는 당시 함께 살던 시어머니를 설득했다. 지금 내가 피아노를 배워서 두 아이를 가르친다면, 시간과 돈을 절약하고 훨씬 더 교육적일 거라고. 듣고 있던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배워라!"
바이엘 상권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피아노학원 강사가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엄마들이 처음에는 열의를 가지고 배우지만 꾸준히 하는 사람이 드물고, 시댁과 친정의 대소사 때문에 한 번씩 빠지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선생의 그 말을 뒤집고 하루에 한 번도 모자라 아침저녁 두 번씩 교습소를 들락거렸다.
김경희(45, 대전여민회 공동대표)씨는 하고 싶은 것은 꼭 하는, 그렇지 않으면 병이 나는 열혈 아줌마다. 대학 졸업 후 결혼으로 평범한 길을 가고 있던 김경희씨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도 그 못 말리는 열정과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아파트 반장'"
그의 본성이 아낌없이 발휘된 것은 아파트 반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대전 토박이로 결혼 후 우여곡절 끝에 대출을 받아 마련하게 된 아파트. 삭막하다고 하는 아파트 생활에서도 그녀는 좀 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게 그렇게 불편하더라고요. 이웃 꼬마를 만나도 몇 살인지, 몇 호에 사는지 물어보고 잘 가라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죠. 그런 걸 보고 사람들이 친근하게 생각했는지 같은 라인 사람들이 반장을 하라고 부추기더라고요."
졸지에 반장이 된 그녀는 이왕 하는 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게 일을 풀어나가자고 맘먹었다. 반상회를 하기 전, 게시판에 마음을 움직이는 한 줄의 시나 의미 있는 글, 주부에게 정보가 되는 글들을 붙여놨다. 벌금 물리지 않으면 사람 하나 모이지 않는다는 반상회에 사람들이 제법 모이기 시작했다. 게시판의 글을 보고 "한 번 와보고 싶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상회가 활성화되자 참석 여부에 따라 회비를 걷었다. 회비를 모아 그때 한창 유행이던 반찬용기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삭막한 아파트, 우린 이렇게 극복했어요"
그 다음 김경희씨는 부녀회장을 맡게 됐다. 물론 그것도 의도한 건 아니었다. 부녀회장을 뽑는 자리에서 얼떨결에 사회를 맡았다가 부녀회장을 염두에 두고 있던 사람 대신 그녀가 부녀회장에 당선된 것. 얼떨결에 부녀회장이 되긴 했지만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부녀회장은 있는데 회원은 없더라고요.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고 싶어서 또 게시판에 회원모집 공고를 붙였죠. 그렇게 해서 40여 명의 사람이 모였어요. 회원들이 각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맡고 그렇게 부녀회 활동을 시작했죠."
김경희씨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대전 파랑새 아파트 부녀회장을 하며 아파트 공동체라는 새로운 실험을 하게 된다. 콘크리트 아파트에 정이 오가면서 메말라가던 사람들을 자매애로 뭉치게 했다. 가장 신났던 일은 바로 벼룩시장.
벼룩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주부들은 식구들의 먹을거리 장만에서 해방됐다. 김밥을 팔 때 엄마들은 집에서 쓰는 김말이를 하나씩 들고 나와 김밥을 말아 놓고 다시 집으로 가 볼일을 봤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1000원짜리 엄마손 김밥. 요즘 팔리는 1000원짜리 김밥의 원조라고 김경희씨는 웃었다.
부녀회 일하는 재미를 알게 된 아줌마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치를 잘 담그는 회원은 직접 장을 보고 김치를 만들었다. 김치값도 시중보다 싸서 주민들의 호응도도 높았다. 이런 일들이 이어지면서 아파트는 재산의 의미가 아니라 인정미 넘치는 삶의 공간으로 변화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 '~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잖아요.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가령 아이가 어려서 문제가 된다면 아이가 어린 만큼 자기가 움직이면 되는 거죠. 미루기만 하면 절대 못해요. 아이가 어려서 못하는 일을 그 아이가 크면 할 수 있을까요? 컸기 때문에 또 못하는 거죠."
한창 부녀회 일에 재미를 느낄 때쯤 김경희씨는 대전여민회에서 활동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1987년 12월 창립한 대전여민회는 여성의 권익신장, 양성평등사회실현, 여성평등 노동관 확보를 위한 법률제정과 개정 등 고용평등 환경조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97년 즈음의 대전여민회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인해 개점 휴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죠. 나가서 전화라도 받고 있으면 누군가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보험 외판원이 상품을 팔 듯이 제일 친한 친구부터 찾아가 여민회에 대해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죠."
김경희씨는 사람들이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만을 요구했다. 친구들 중에는 돈이 있는 친구가 있었고, 아이디어가 뛰어난 친구들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 친구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 "너는 돈이 있으니까 회비를 내라" "너는 가치판단을 잘하니까 회의 때 좋은 의견을 내라"는 식으로 말이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기꺼이 김경희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모이는 사람들의 연령이나 고민도 다양했지만 조금씩 일을 하면서 단체를 추스르기 시작했다. 이때 김경희씨는 또 하나의 도전을 하게 된다.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체계적인 조직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행정학 공부를 시작했죠.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요. 그때 쌍둥이가 만 세 살이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어머님들, 스스로의 인생을 발견하세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당했던 일들과 6남매의 막내로서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고민과 혼란도 몰려왔다. 대학에 다닐 때 학생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여성으로서 특별한 의식을 지녀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줌마 김경희가 변하는 순간이었다.
"여민회 활동을 하면서 '내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나 할까요? 이 일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을 거예요."
대전여민회는 지금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다. 재활용 가게인 '보물창고'과 어린이 책사랑방 '도토리', 어린이 책잔치, 주민강좌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여성을 위한 문화활동과 양성평등 교육을 하고 성인권활동, 평화통일 실현활동 등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전지역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힘이 되도록 힘들고 어려운 여성들의 언니 역할을 착실히 해 나가고 있다.
"여성들이 주로 모이는 공간이라 그런지 정으로 친해질 수밖에 없어요. 대학에 강의 나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게 저한테는 재산처럼 여겨져요. 처음 여민회 찾아와서 말을 잘 못하는 회원이 점차 자기 의견을 개진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이 눈에 띌 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
대전여민회에는 각종 소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연극모임의 경우 회원들이 직접 대본 작업을 해서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한 회원은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분야에 당선되기도 했다고.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기 안의 내적 동기가 여민회를 통해 발현된 것이다.
아줌마들의 수다모임이라고 치부되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시작된 김경희 대표의 항해는 계속되고 있다.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닌 의견과 역할을 나누며 스스로 새롭게 발견해 가면서 살아 움직이는 게 바로 삶임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글/사진_한미숙 오마이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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