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안나님을 소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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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전여민회 댓글 0건 조회 8,327회 작성일 10-05-13 12:35본문
강사 황안나: 본명은 황경화, 안나는 세례명. 40년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명예퇴임 후 도보여행을 시작했습니다. 65세에 혼자 국토종단을 했고, 67세에 역시 혼자서 해안일주(4천킬로미터)를 마쳤으며, 그해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길을 걸었습니다.《내 나이가 어때서》《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의 저자이자 여러 잡지에 여행기를 연재 중인 칼럼니스트. 71세인 지금도 20대 못지않은 열정과 체력을 겸비한 멋진 할머니. 1만명 이상 다녀가는 인기블로그: http://kr.blog.yahoo.com/ropa420kr를 운영중에 있습니다.
정말 멋진 분이죠? 저는 벌써 이 분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요.
이제 이년 후면 50살을 맞이하는 저는 어떤 오십을 맞이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50대 보다는 70대 선배님들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권술룡선생님, 황안나선생님... 두분 모두 70대 이시면서 도보여행가, 순례자이십니다.
저는 오십부터 두분 처럼 길을 떠나고 싶어요.
그런데 어쪄죠? 동네에서 하고싶은 일도 너무 많아서...
그래도 지금부터 길 떠나는 연습을 하려고 해요.
6월 24일 목요일 황안나님의 강연<자신을 감동시켜라!> 놓치지 마세요.
'빠름'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철도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지나치며 살아 간다. 하지만 속도
를 줄이고 걸으면 길 위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냥 지나쳤을 이름 모
를 꽃들과 바람의 향기 그리고 사람의 온기. 길은 인생의 쉼표가 된다.
황안나(본명 황경화·68)씨에게 길은 치유의 길이다. 2005년 땅끝 마을 해남에
서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2천리를 혼자 걸었고, 2006년에는 강원도
고성에서 임진각 통일전망대까지 해안도로 2천km를 홀로 걸었다. 또한 그녀
에게 '늙음'은 부질없는 핑계다. 쉰 살에 운전면허를 따고, 50대 중반에
컴퓨터를 배웠다. 환갑이 넘어서야 암벽등반과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인터넷 블로그를 운영하고 책도 두 권이나 냈다.
황안나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본명은 황경화다. '집안의 경사스러운 꽃'이라
며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안나는 가톨릭신자인 그녀의 세례명이고, 안나라
는 이름이 인터넷에서 알려진 것이 본명처럼 굳어졌다. 지난달 30일 강연을 위
해 안동을 찾은 그녀를 만났다. 사진을 배운다는 그녀의 어깨엔 묵직한 DLSR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개발의 편자'다. "사진을 잘 찍지
도 못하는데 카메라만 좋은 것이라 늘 부끄러워요. 호호." 칠순을 바라보는 그
녀는 참 소녀같았다. "할머니가 무슨…." 쑥스러운 듯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
의 손톱 끝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었다. 참 잘 어울린다 싶다.
◆ 이만하길 다행이야
2005년 자신의 이름 석자가 찍힌 책이 세상에 나오던 날, 그녀는 대형 서점판
매대 옆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누군가 그녀의 책을 들춰볼라치
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열여섯살때 꿈이 돌고 돌아
예순여섯이 돼서야 이뤄졌구나."
어린 시절 그녀의 꿈은 작가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겠다는 소녀의 꿈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그대로 멈췄다. 6남매 중 맏딸, 동생들 학비를 대야하는 처지에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한 덕에 교사가 됐지만 끝내 대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교편을 잡으며 문예반 맡아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학교 교지를 담당했다. 여성지에 글을 보내면 곧잘 실리곤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작가는 아니었지만 '변방에서 우짖는 새'"였다.
결혼 전에는 생활비와 학비를 대야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빚을 갚아야했다. 잇따른 남편의 사업실패. 스물셋부터 시작된 빚의 굴레는 27년이나 계속됐다. "남편 사업은 10전 11기도 넘어요. 양계, 조경, 군납, 서점, 개인택시 등등 안 해본 게 없어요." 남편은 손대는 족족 실패했다. 그녀의 월급은 한푼도 남김없이 채무자들에게 돌아갔다. 1982년 그녀의 월급이 10만원을 넘지 않을 때 그녀의 빚은 3천만원이나 됐다. 가난은 지독했다. 갓난아이에게 먹일 것이 없어 매일 콩만 삶아 먹였다. 눈을 뜨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가슴을 쳤다. 함박눈이 모질게도 퍼붓던 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먼 친척을 찾아갔다. 돈을 좀 빌려볼 심산이었다. 돌아온 건 냉랭한 거절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시던 어머니가 뇌까렸다. "정신차려. 설마 죽겠어?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다." 어머니의 그 말은 이후 그녀의 좌우명이 됐다.
가난의 터널에도 끝이 보였다. 그녀 나이 마흔 다섯,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다. 남편에게 '홀로서기'가 절실하다는 생각 끝에 내린 결심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영세한 공장의 경비원으로 다시 시작했다. 홀로서기는 3년만에 성공했다. "진짜 이혼할 생각은 없었으니 정식으로 이혼 신고는 하지 않았어요. 3년 후에 남편으로부터 초대장이 왔더군요. 아주 작은 욕실 용품 수출 공장을 개업했더라고요. 그 후로 살림이 풀려서 50세가 되던 해에 빚을 모두 갚았어요." 일생의 절반을 고통을 겪게 한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없을까. "남편은 정말 섬세하고 가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거듭된 실패로 밥을 굶기기는 했어도 그런 고생을 다 상쇄하고도 남았어요. 하도 주변에서 남편을 인간 이하로 보니까 '그래,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마' 그랬죠. 지금 남편은 '당신이 그렇게 도보여행을 해낼 수 있었던 건 다 내가 훈련을 시킨 덕이야'라고 눙치곤 해요. 하하."
▲ 2006년 해안도로 일주 중 어느 바닷가에서.
◆ 길위에서 길을 묻다
-도보여행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60대 중반이 되니 우리 땅을, 붉은 황토를 내 발로 밟으며 걸어보고 싶더라고요.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전국의 산은 다 다녔어요. 지리산은 종주만 7번을 했고 나중에는 백두대간 종주까지 했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몸이 날래고 체력이 붙은 거예요. 나이들어서 어떻게 걷냐고 하는데 그건 힘이 아녜요. 머리가 가자면 다리는 따라오게 돼 있거든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듯, 내가 너무 걷고 싶으니까 가능한 거죠. 주변에서는 '미련하다', '무모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하긴 미련하고 무식하고 멍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먼 길을 걷겠어요. 그래도 막막하고 외로워서 길 위에서 참 많이 울었어요."
-길을 걸으며 무엇을 얻으셨나요?
"젊은 시절 몸이 고생했던 기억은 다 잊었는데요. 인간적으로 저를 짓밟은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입었던 상처는 몇 십년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길을 온종일 혼자 걸으며 생각을 해보니까 저도 남에게 상처를 많이 입혔더라고요. 길 위의 고백성사라고 할까. 길 위에서 용서도 빌었고, 제가 이를 갈며 미워했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됐어요. 용서의 길이었고, 치유의 길이기도 했죠."
◆ 안나는 실수투성이
-잃어버린 것은 없습니까?
"친정어머니가 올해 93세인데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도보여행을 하면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너무 기다리게 해 마음이 아프고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워요." (그녀의 어머니 홍영녀씨는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 경기도 포천에서 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일흔에 손자에게서 배운 한글로 20여년 간 일기를 썼고, 10년간의 일기를 모아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2006년 KBS TV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됐고, 올해 초에는 공익 광고에도 출연했다. 홍씨는 지난 7월 집에서 넘어지면서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지만, 뇌경색과 부정맥 등으로 반신이 마비되고 의식이 혼미한 상태다. 황씨의 6남매는 간병인 없이 돌아가며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황씨는 "후회스럽고 가슴 아픈 걸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조금이나마 갚으라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길을 걸으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을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전북 구십포해수욕장을 걸을 때였어요. 배가 고파 식당에 들어갔다가 간암 말기라는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이 제 밥값을 계산하고 5만원을 카운터에 맡기고 가셨더라고요. 제가 그 돈을 차마 쓰지 못하고 부적처럼 갖고 다녔어요. 자기가 입대영장이 떨어질때(죽을때)까지 연락하고 지내자면서 헤어졌는데 얼마전에 전화를 해보니 '없는 번호'라고 해요. 떠났나봐요. 경남 김해 근처에서는 한적한 옛 도로를 지나다가 길 가에서 트럼펫을 부는 사람을 만났어요. 신청곡을 하라기에 '대니 보이'를 청하고 길을 떠나는데 길가는 봄볕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바람결을 타고 트럼펫 소리가 끊겼다, 들렸다 하는데 눈물이 다 났어요."
-지난 8월에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이라는 책을 내셨죠?
"블로그에 올린 제 실수담을 모은 건데요. 97편 중에 70편을 고르고 '인생비법'으로 15편을 따로 썼어요. 사실 책으로 낼 생각이 없었는데 제가 해안 도보 일주를 책으로 쓰다가 컴퓨터가 고장나서 모두 날리는 바람에 대신 내게 된 거예요."
-'앗! 나(안나)의 실수'로 많은 실수담을 올리는데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실수담이 뭔가요?
"단골로 다니는 슈퍼마켓에 감자를 사러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반바지를 입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어쩌다 보니 민망한 곳이 다 보이더라고요. 그걸 보다가 '감자 한 관 주세요.'한다는 것이 '不RAL 한 관 주세요' 그런 거예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뜻해져요. 최근에는 친정에서 만두를 빚은 적이 있는데요. 밀가루가 묻으니까 검은 등산복 바지를 거꾸로 입고 만두를 빚었어요. 한참 그러고나니 시간이 늦어서 허겁지겁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거예요. 온통 밀가루가 묻은 바지를 거꾸로 입은 채였던 거죠. 내려서 갈아입을까 하다가 '이왕 사람들이 다 봤는데 그냥 가자' 그러면서 1시간 30분을 더 지하철을 타고 갔어요."
◆ 행복은 누리는 자의 몫이다
-좀 더 젊고 건강할 때 시작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없나요?
"60대가 되어 누리는 삶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만약 노년에 그냥 안주하면서 80세까지 산다면 20년이 너무 허망하잖아요. 얼마 전 구룡령 옛길을 걸으며 70대에는 어떤 장을 열고 살아갈까 생각을 했어요. 아마 견디는 세월이겠죠. 나이를 먹고 남편도 제 곁을 떠나면 자식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리는 삶이 얼마나 외롭겠어요? 70대에는 사진도 배우고 공부를 더해서 글을 쓰면 견디는 견디는 세월이 수월할 것 같아요."
-남편 탓에 고생을 참 많이 하셨는데,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과 결혼하실건가요?
"길을 떠나 멀리 두고 보니까 이런 남편이 없어요. 그러고 보면 제게는 차고 넘치는 남편이에요. 낯선 길위에서 눈물나게 외로울 때 전화를 하면 너무 보고 싶어서 '여보~'에 'ㅇ'자가 절로 붙거든요. 주변에서는 저희보고 '닭살부부'라고 그래요. 노년인데도 두번째 신혼이에요."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행복은 누리는 자의 몫이다. 또 자유는 용감한 자의 몫이다. 나눠라, 걸어라, 잊어라. 그런 정도겠죠. 젊을때는 남과 비교하면서 상처도 많이 받고 괴로웠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까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냉방에서 깨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커피를 마셔도 '아, 행복해.' 그랬거든요. 그러니 행복은 제 몸의 안경같아요.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행복은 자신이 찾아서 누릴 줄 알아야해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황안나는?=1940년 개성 출생. 본명은 황경화(黃慶花). 해방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내려왔다. 춘천역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춘천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몸담았다. 39년6개월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명예퇴직을 한 뒤 65세에 해남~통일전망대까지 국토종단을 했고, 67세에는 동해~남해~서해까지 해안을 따라 4천km를 홀로 걸었다. 2007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아들, 며느리와 걸었고, 올 봄에는 100km 울트라 걷기대회에 참가해 46등으로 완주했다. 그녀의 블로그 '맛있게 살기(http://kr.blog.yahoo.com/ropa420kr)'는 하루 5천여명이 오가고 누적방문자가 150만명을 넘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 등 2권의 책을 냈다.
[출처] 황안나-길은, 내 인생의 쉼표…도보여행가 황안나|작성자 샨티
정말 멋진 분이죠? 저는 벌써 이 분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요.
이제 이년 후면 50살을 맞이하는 저는 어떤 오십을 맞이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50대 보다는 70대 선배님들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권술룡선생님, 황안나선생님... 두분 모두 70대 이시면서 도보여행가, 순례자이십니다.
저는 오십부터 두분 처럼 길을 떠나고 싶어요.
그런데 어쪄죠? 동네에서 하고싶은 일도 너무 많아서...
그래도 지금부터 길 떠나는 연습을 하려고 해요.
6월 24일 목요일 황안나님의 강연<자신을 감동시켜라!> 놓치지 마세요.
'빠름'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철도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지나치며 살아 간다. 하지만 속도
를 줄이고 걸으면 길 위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냥 지나쳤을 이름 모
를 꽃들과 바람의 향기 그리고 사람의 온기. 길은 인생의 쉼표가 된다.
황안나(본명 황경화·68)씨에게 길은 치유의 길이다. 2005년 땅끝 마을 해남에
서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2천리를 혼자 걸었고, 2006년에는 강원도
고성에서 임진각 통일전망대까지 해안도로 2천km를 홀로 걸었다. 또한 그녀
에게 '늙음'은 부질없는 핑계다. 쉰 살에 운전면허를 따고, 50대 중반에
컴퓨터를 배웠다. 환갑이 넘어서야 암벽등반과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인터넷 블로그를 운영하고 책도 두 권이나 냈다.
황안나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본명은 황경화다. '집안의 경사스러운 꽃'이라
며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안나는 가톨릭신자인 그녀의 세례명이고, 안나라
는 이름이 인터넷에서 알려진 것이 본명처럼 굳어졌다. 지난달 30일 강연을 위
해 안동을 찾은 그녀를 만났다. 사진을 배운다는 그녀의 어깨엔 묵직한 DLSR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개발의 편자'다. "사진을 잘 찍지
도 못하는데 카메라만 좋은 것이라 늘 부끄러워요. 호호." 칠순을 바라보는 그
녀는 참 소녀같았다. "할머니가 무슨…." 쑥스러운 듯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
의 손톱 끝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었다. 참 잘 어울린다 싶다.
◆ 이만하길 다행이야
2005년 자신의 이름 석자가 찍힌 책이 세상에 나오던 날, 그녀는 대형 서점판
매대 옆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누군가 그녀의 책을 들춰볼라치
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열여섯살때 꿈이 돌고 돌아
예순여섯이 돼서야 이뤄졌구나."
어린 시절 그녀의 꿈은 작가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겠다는 소녀의 꿈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그대로 멈췄다. 6남매 중 맏딸, 동생들 학비를 대야하는 처지에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한 덕에 교사가 됐지만 끝내 대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교편을 잡으며 문예반 맡아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학교 교지를 담당했다. 여성지에 글을 보내면 곧잘 실리곤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작가는 아니었지만 '변방에서 우짖는 새'"였다.
결혼 전에는 생활비와 학비를 대야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빚을 갚아야했다. 잇따른 남편의 사업실패. 스물셋부터 시작된 빚의 굴레는 27년이나 계속됐다. "남편 사업은 10전 11기도 넘어요. 양계, 조경, 군납, 서점, 개인택시 등등 안 해본 게 없어요." 남편은 손대는 족족 실패했다. 그녀의 월급은 한푼도 남김없이 채무자들에게 돌아갔다. 1982년 그녀의 월급이 10만원을 넘지 않을 때 그녀의 빚은 3천만원이나 됐다. 가난은 지독했다. 갓난아이에게 먹일 것이 없어 매일 콩만 삶아 먹였다. 눈을 뜨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가슴을 쳤다. 함박눈이 모질게도 퍼붓던 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먼 친척을 찾아갔다. 돈을 좀 빌려볼 심산이었다. 돌아온 건 냉랭한 거절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시던 어머니가 뇌까렸다. "정신차려. 설마 죽겠어?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다." 어머니의 그 말은 이후 그녀의 좌우명이 됐다.
가난의 터널에도 끝이 보였다. 그녀 나이 마흔 다섯,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다. 남편에게 '홀로서기'가 절실하다는 생각 끝에 내린 결심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영세한 공장의 경비원으로 다시 시작했다. 홀로서기는 3년만에 성공했다. "진짜 이혼할 생각은 없었으니 정식으로 이혼 신고는 하지 않았어요. 3년 후에 남편으로부터 초대장이 왔더군요. 아주 작은 욕실 용품 수출 공장을 개업했더라고요. 그 후로 살림이 풀려서 50세가 되던 해에 빚을 모두 갚았어요." 일생의 절반을 고통을 겪게 한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없을까. "남편은 정말 섬세하고 가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거듭된 실패로 밥을 굶기기는 했어도 그런 고생을 다 상쇄하고도 남았어요. 하도 주변에서 남편을 인간 이하로 보니까 '그래,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마' 그랬죠. 지금 남편은 '당신이 그렇게 도보여행을 해낼 수 있었던 건 다 내가 훈련을 시킨 덕이야'라고 눙치곤 해요. 하하."
▲ 2006년 해안도로 일주 중 어느 바닷가에서.
◆ 길위에서 길을 묻다
-도보여행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60대 중반이 되니 우리 땅을, 붉은 황토를 내 발로 밟으며 걸어보고 싶더라고요.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전국의 산은 다 다녔어요. 지리산은 종주만 7번을 했고 나중에는 백두대간 종주까지 했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몸이 날래고 체력이 붙은 거예요. 나이들어서 어떻게 걷냐고 하는데 그건 힘이 아녜요. 머리가 가자면 다리는 따라오게 돼 있거든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듯, 내가 너무 걷고 싶으니까 가능한 거죠. 주변에서는 '미련하다', '무모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하긴 미련하고 무식하고 멍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먼 길을 걷겠어요. 그래도 막막하고 외로워서 길 위에서 참 많이 울었어요."
-길을 걸으며 무엇을 얻으셨나요?
"젊은 시절 몸이 고생했던 기억은 다 잊었는데요. 인간적으로 저를 짓밟은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입었던 상처는 몇 십년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길을 온종일 혼자 걸으며 생각을 해보니까 저도 남에게 상처를 많이 입혔더라고요. 길 위의 고백성사라고 할까. 길 위에서 용서도 빌었고, 제가 이를 갈며 미워했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됐어요. 용서의 길이었고, 치유의 길이기도 했죠."
◆ 안나는 실수투성이
-잃어버린 것은 없습니까?
"친정어머니가 올해 93세인데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도보여행을 하면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너무 기다리게 해 마음이 아프고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워요." (그녀의 어머니 홍영녀씨는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 경기도 포천에서 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일흔에 손자에게서 배운 한글로 20여년 간 일기를 썼고, 10년간의 일기를 모아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2006년 KBS TV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됐고, 올해 초에는 공익 광고에도 출연했다. 홍씨는 지난 7월 집에서 넘어지면서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지만, 뇌경색과 부정맥 등으로 반신이 마비되고 의식이 혼미한 상태다. 황씨의 6남매는 간병인 없이 돌아가며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황씨는 "후회스럽고 가슴 아픈 걸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조금이나마 갚으라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길을 걸으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을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전북 구십포해수욕장을 걸을 때였어요. 배가 고파 식당에 들어갔다가 간암 말기라는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이 제 밥값을 계산하고 5만원을 카운터에 맡기고 가셨더라고요. 제가 그 돈을 차마 쓰지 못하고 부적처럼 갖고 다녔어요. 자기가 입대영장이 떨어질때(죽을때)까지 연락하고 지내자면서 헤어졌는데 얼마전에 전화를 해보니 '없는 번호'라고 해요. 떠났나봐요. 경남 김해 근처에서는 한적한 옛 도로를 지나다가 길 가에서 트럼펫을 부는 사람을 만났어요. 신청곡을 하라기에 '대니 보이'를 청하고 길을 떠나는데 길가는 봄볕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바람결을 타고 트럼펫 소리가 끊겼다, 들렸다 하는데 눈물이 다 났어요."
-지난 8월에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이라는 책을 내셨죠?
"블로그에 올린 제 실수담을 모은 건데요. 97편 중에 70편을 고르고 '인생비법'으로 15편을 따로 썼어요. 사실 책으로 낼 생각이 없었는데 제가 해안 도보 일주를 책으로 쓰다가 컴퓨터가 고장나서 모두 날리는 바람에 대신 내게 된 거예요."
-'앗! 나(안나)의 실수'로 많은 실수담을 올리는데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실수담이 뭔가요?
"단골로 다니는 슈퍼마켓에 감자를 사러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반바지를 입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어쩌다 보니 민망한 곳이 다 보이더라고요. 그걸 보다가 '감자 한 관 주세요.'한다는 것이 '不RAL 한 관 주세요' 그런 거예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뜻해져요. 최근에는 친정에서 만두를 빚은 적이 있는데요. 밀가루가 묻으니까 검은 등산복 바지를 거꾸로 입고 만두를 빚었어요. 한참 그러고나니 시간이 늦어서 허겁지겁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거예요. 온통 밀가루가 묻은 바지를 거꾸로 입은 채였던 거죠. 내려서 갈아입을까 하다가 '이왕 사람들이 다 봤는데 그냥 가자' 그러면서 1시간 30분을 더 지하철을 타고 갔어요."
◆ 행복은 누리는 자의 몫이다
-좀 더 젊고 건강할 때 시작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없나요?
"60대가 되어 누리는 삶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만약 노년에 그냥 안주하면서 80세까지 산다면 20년이 너무 허망하잖아요. 얼마 전 구룡령 옛길을 걸으며 70대에는 어떤 장을 열고 살아갈까 생각을 했어요. 아마 견디는 세월이겠죠. 나이를 먹고 남편도 제 곁을 떠나면 자식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리는 삶이 얼마나 외롭겠어요? 70대에는 사진도 배우고 공부를 더해서 글을 쓰면 견디는 견디는 세월이 수월할 것 같아요."
-남편 탓에 고생을 참 많이 하셨는데,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과 결혼하실건가요?
"길을 떠나 멀리 두고 보니까 이런 남편이 없어요. 그러고 보면 제게는 차고 넘치는 남편이에요. 낯선 길위에서 눈물나게 외로울 때 전화를 하면 너무 보고 싶어서 '여보~'에 'ㅇ'자가 절로 붙거든요. 주변에서는 저희보고 '닭살부부'라고 그래요. 노년인데도 두번째 신혼이에요."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행복은 누리는 자의 몫이다. 또 자유는 용감한 자의 몫이다. 나눠라, 걸어라, 잊어라. 그런 정도겠죠. 젊을때는 남과 비교하면서 상처도 많이 받고 괴로웠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까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냉방에서 깨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커피를 마셔도 '아, 행복해.' 그랬거든요. 그러니 행복은 제 몸의 안경같아요.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행복은 자신이 찾아서 누릴 줄 알아야해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황안나는?=1940년 개성 출생. 본명은 황경화(黃慶花). 해방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내려왔다. 춘천역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춘천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몸담았다. 39년6개월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명예퇴직을 한 뒤 65세에 해남~통일전망대까지 국토종단을 했고, 67세에는 동해~남해~서해까지 해안을 따라 4천km를 홀로 걸었다. 2007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아들, 며느리와 걸었고, 올 봄에는 100km 울트라 걷기대회에 참가해 46등으로 완주했다. 그녀의 블로그 '맛있게 살기(http://kr.blog.yahoo.com/ropa420kr)'는 하루 5천여명이 오가고 누적방문자가 150만명을 넘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 등 2권의 책을 냈다.
[출처] 황안나-길은, 내 인생의 쉼표…도보여행가 황안나|작성자 샨티